따온 글들
정어리 회장, 도시바의 토고 토시오
유정 김용호
2012. 9. 19. 11:27
[상도경영아카데미::홍하상] 정어리 회장, 도시바 토고 토시오

게이단렌의 제4대 회장이자 도시바의 회장을 역임한 토고 토시오는 소신 있는 경영자로 아직까지 칭송되는 인물입니다. 사람이 원칙을 세우기는 쉬워도 그것을 지켜가기란 보통 어렵지가 않지요. 그런데 토고 회장은 "사회는 풍부하게, 개인은 검소하게, 개념은 높게, 생활은 낮게"라는 원칙을 세우고 평생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럼 경영에 엄격했고 자신에게는 더더욱 엄격했던 토고회장의 기업가정신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토고 토시오(1896~1988)는 1896년에 오카야마 현에서 태어나 도쿄고등공업학교 즉 오늘날의 도쿄공업대학 기계과를 졸업했습니다. 첫 직장은 민간 조선소인 도쿄 이시카와지마 조선소였는데요, 터빈 설계 부문에 배속 받아 입사 1년 반에 엄청난 과제가 떨어집니다. 바로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증기터빈회사에 터빈의 국산화를 위해 기술을 배워오라는 것이었죠. 토고는 훗날 일본에 제트 엔진 기술을 뿌리 내린 결정적 인물로 평가되는데요. 2년여의 스위스에서의 경험에다가, 후에 미국 GE사에 가서 선진기술을 전수해 오는 등 일본에서 “터빈기술이면 토고”다 할 정도로 기술책임자가 되죠. 1944년 화룡이라는 전투기의 터보제트엔진의 총책임자도 바로 토고였습니다.
기술자이던 그가 경영자로서의 활약을 시작한 것은 1946년이었습니다. 이시키와 지마와 도시바가 공동출자한 터빈전문회사의 기술부장을 거쳐 사장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취임한지 4년 후 토고는 무려 직원이 5,000명에 이르는 하리마중공업을 합병하는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회사는 단 500명 규모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하리마중공업은 덩치만 컸지 연속 적자를 내는 바람에 봉급은 나가지 않아 파업만 계속되었습니다.
하리마 중공업의 사장이 된 날, 그는 시내버스를 타고 걸어서 아침7시에 공장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정문으로 들어오는 그에게 수위가 ,당신 누구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번에 사장이 된 토고토시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회사재건을 맡은 토고 회장의 경영합리화 방침은 딱 하나였습니다. 바로 ‘능력이 없는 임원은 해고 시킨다’는 것이었죠. 그는 온정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실적 위주의 평가로 만인이 보아도 납득이 되는 통계자료를 놓고 임원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붙은 별명이 ‘미스터 합리화’였습니다. 결국 이시카와시마 중공업은 그 후 세계 제일의 건조량을 자랑하는 조선기업으로 성장합니다. 이 원칙은 이후 도시바 경영에도 이어집니다. 1965년 도쿄 지바우라 전기, 즉 오늘날의 도시바에 사장으로 취임할 때 당시 회사는 경영난에 빠져있었는데요. 취임하면서 그가 한 말은 “직원 여러분은 앞으로 3배 더 일해 달라, 임원은 10배 더 일해 달라. 나는 그 이상으로 일하겠다” 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모든 휴일을 반납하고 1년 365일 매일 오전 7시전에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회사의 임원들은 오전 10시에 출근했고, 저녁에는 긴자의 클럽에서 노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늦게 출근하던 임원들도 스스로 아침 일찍 출근하게 되었죠.
이어 그는 회사 사보에 자신이 직접 쓴 <회사 재건계획>이라는 원고를 게재하고, 그 사보를 들고 다니며 사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직접 보여주면서 꼭 읽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5천명사원 전부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장장 7년간에 걸친 체질개선 작업은 결국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지요.
또 제4대 경단련의 회장으로서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도 경영인들은 조찬모임을 많이 하는데, 그 시초가 바로 토고 회장입니다. 그는 경영인들이 저녁에 만나 회의를 끝내고 술자리로 이어지는 것을 원천차단하기 위해서 모임시간을 아침으로 바꿉니다. 또 2박3일이 관행이 되어있는 지방 출장은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모두 당일 출장으로 끝낸다는 원칙도 세웁니다. 현지에서 숙박하게 되면 저녁 대접을 받게 되는 걸 원천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회장일 당시 게이단렌 빌딩의 엘리베이터는 단 한 대만 가동되었는데요, 그것은 고객만 쓸 수 있고 자신을 비롯한 직원들은 모두 계단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기업인들에게는 검소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행정에서도 많은 공적을 세우고 그는 1986년, 무려 90세에 은퇴를 합니다.
그런데 그의 화려한 이력 뒤에 꼭 짚어야할 그의 면모가 있습니다.
바로 그의 소신이기도 한 검소한 생활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오전 5시 전에 기상했으며 43년간 이발소에 간 적이 없고, 아들이 항상 이발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머리빗은 50년 이상을 사용했고, 양치컵은 평생 단 한 개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모자는 기워서 썼으며, 평생 출 퇴근 시에는 관용차를 쓰지 않고 버스나 전철을 이용했습니다. 관련해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시카와 시마 터빈주식회사에서 대형합병을 진행할 때 한번은 인수합병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정보를 포착한 일본 검찰이 토고회장을 조사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담당검사는 새벽 6시에 토고회장의 집을 전격 조사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출근을 하기 위해 동네 버스 정류장에 서있었습니다. 조사야 계속 진행했겠지만 그때 검사는 이미 “그가 혐의가 없을 것이다” 확신했다고 합니다.
평생 식사는 가장 값이 싼 생선인 정어리 구이와 채소반찬, 된장국과 보리밥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정어리회장 토고”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다고 하죠. 그는 이때 연봉 5천만 엔을 받아 매월생활비 10만 엔을 제외한 나머지 4880만 엔 전액을 요코하마에 있는 다치바나 여학생학원에 전액기부 했습니다. 여학교를 택한 이유는 장차 어머니가 될 여성을 잘 가르쳐야 자식을 잘 가르치고, 국가가 바로 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땀을 보여라”, “일이 되고 안 되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집념이 없어서이다.” 그가 남긴 말들입니다.
토고 토시오, 그는 오늘날 경영인의 참모습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몸으로 실천한 경영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