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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가는 길 - 청파동 1 등 / 박준의 시 세계

유정 김용호 2016. 12. 30. 13:39

용산 가는 길 

 

  - 청파동 1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病)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悖)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번 잡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2:8

-청파동 2

 

 

  밤이 오래된 마을의 가르마를 타 보이고 있다 청파동의

밤, 열에 둘은 가로등 열에 여덟은 창문이다 빛을 쐬면서 열

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은 앓았다 두 번쯤 울고 여덟 번

쯤 누울 자리를 봐두었다 열에 둘은 잔정이 남아 있었다 또

내가 청파동에서 독거(獨居)니 온실이니 근황이니 했던 말

들은  열에 여덟이 거짓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생각하지 않

아도 당신이 보고 있을 내 모습이 보인다 새실새실 웃다가

도 괜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둘 다시 당

신을 생각해 웃다가 여전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여덟이었다 남은 청파동 사람들이 막을 떠나가고 있

었다 이제 열에 둘은 폐가고 열에 여덟은 폐허였다


관음

          - 청파동 3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 있다


청파동의 밤길은 혼자 밝았다가

혼자 어두워지는 너의 얼굴이다


일제 코끼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 먹는 반지하 집, 블라우스를

털어 늘고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시키고 TV의 음량버튼을 나무

젖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무를 집어먹고 엄마 체르니 삼십번부터는

회비가 오른대 고장 난 흰 건반 대신 반음 올려 검은 건반을 치며

목이 하얀 네가 말했습니다 그 방 창문 옆에서 음지식물처럼

숨죽이고 있던 내걸음을 길과 나의 椄접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덕분에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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