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가는 길 - 청파동 1 등 / 박준의 시 세계
용산 가는 길
- 청파동 1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病)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悖)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번 잡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2:8
-청파동 2
밤이 오래된 마을의 가르마를 타 보이고 있다 청파동의
밤, 열에 둘은 가로등 열에 여덟은 창문이다 빛을 쐬면서 열
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은 앓았다 두 번쯤 울고 여덟 번
쯤 누울 자리를 봐두었다 열에 둘은 잔정이 남아 있었다 또
내가 청파동에서 독거(獨居)니 온실이니 근황이니 했던 말
들은 열에 여덟이 거짓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생각하지 않
아도 당신이 보고 있을 내 모습이 보인다 새실새실 웃다가
도 괜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둘 다시 당
신을 생각해 웃다가 여전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여덟이었다 남은 청파동 사람들이 막을 떠나가고 있
었다 이제 열에 둘은 폐가고 열에 여덟은 폐허였다
관음
- 청파동 3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 있다
청파동의 밤길은 혼자 밝았다가
혼자 어두워지는 너의 얼굴이다
일제 코끼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 먹는 반지하 집, 블라우스를
털어 늘고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시키고 TV의 음량버튼을 나무
젖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무를 집어먹고 엄마 체르니 삼십번부터는
회비가 오른대 고장 난 흰 건반 대신 반음 올려 검은 건반을 치며
목이 하얀 네가 말했습니다 그 방 창문 옆에서 음지식물처럼
숨죽이고 있던 내걸음을 길과 나의 椄접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덕분에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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