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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침례교인들은 무엇을 강조하며 믿고 있는가?(III)

유정 김용호 2018. 1. 23. 18:27

[기고] 침례교인들은 무엇을 강조하며 믿고 있는가?(III)   
김승진 목사(침례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편집자 주] 이 글은 침례신학대학교 교수논문집인 『복음과 실천』 제59집(2017년 봄)에 실린 논문 "침례교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필자가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기고한 것이다. 자유교회 전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침례교회에서는 무엇을 특별히 강조해서 믿고 있는지를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며 5부로 나누어 연재한다.


IV. 침례교인들이 독특하게 믿고 있는 신앙


침례
(Photo : ⓒ Pixabay.com)
▲예수의 침례

침례교회는 기본적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한 "자유교회 전통"(Free Church Tradition)에 속하는 교회로서, 침례교인들은 다른 교파나 교단에 속한 그리스도인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국교체제의 교회를 배격하는 교회(교회와 국가의 분리)

침례교회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성공회)로부터 떠나온 분리주의자들(English Separatists)에 의해 1609년에 처음으로 지상에 태동되었다.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였던 게인즈보로 교회(Gainsborough Church) 성도들과 담임목사 존 스마이드는 뱁티즘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베풀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교회는 국가나 세속권력으로부터 자유하거나 무관한 교회, 순수하고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임을 확신하면서 그러한 교회를 지상에 이루고자 하였다. 이들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교회를 "회복"(restitutio)하여 지상에 재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1639년에 미국 땅에서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던 로저 윌리암즈(Roger Williams, c.1603-1683)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역에는 퓨리탄들(Puritans)에 의해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세워졌는데, 이 교회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정부(Massachusettes Bay Colony)의 국교로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 윌리암즈는 이러한 국교체제의 교회에 항거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국교체제의 기독교를 배격해야 한다면서 유명한 두 가지 비유를 들었다. "십계명의 두 돌판들"과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가 그것이다(McBeth, 135).

십계명 가운데 처음 네 계명은 대신(對神) 관계를 규정하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대인(對人) 혹은 대물(對物)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데, 분리된 두 돌판에 십계명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영적인 권위(spiritual authority)와 민사적인 권위(civil authority)는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Ship at Sea)에서는 비록 배에 왕이나 주지사나 고위 세속정치인이 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배의 선장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Ship at Harbor)에서는 최고의 권위가 그 항구를 관할하고 있는 세속정치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있는 영적인 지도자이고, 국가의 최고권위는 우두머리인 세속정치지도자라는 것이다. 이 두 권위는 분리되어 있어야 비로소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religious freedom for all)가 제대로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교체제의 기독교를 지양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헌법적으로 최초로 규정했던 것은 미국 제1차 수정헌법(The First Amendment, 1791)이었다: "의회는 국교의 제정에 관하여 그리고 자유스러운 종교적인 활동을 금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법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First Amendment to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Wikipedia, [온라인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Amendment_to_the_United_States_Constitution, 2015. 11. 7. 접속.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에서는 제17조항 "종교의 자유"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분명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그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간들의 교리와 명령으로부터 양심을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영적인 수단만을 고려하여야 한다. 국가는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벌을 부과할 권리가 없다.... 자유로운 국가에서의 자유로운 교회는 기독교적인 이상이다(A free church in a free state is the Christian ideal)...." (Blount and Wooddell, ed., 206-7)

물론 세속정부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워진 기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국가권력을 이용하거나 도움을 입고자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성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국가권력의 강요(coercion)나 조작(manipulation)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Norman Cavender, "Freedom for the Church in a Free State," Alan Neely, ed., Being Baptist Means Freedom [Charlotte, NC: The Southern Baptist Alliance Publishers, 1988], 85).

2. 신자의 뱁티즘과 침수례에 의한 뱁티즘

(1) 신자의 뱁티즘

침례교회에서는 유아뱁티즘(유아세례, infant baptism)를 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네 복음서들에서 예수님께서 한 번도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푸신 적이 없었고, 공생애 기간 중에 단 한 번도 유아뱁티즘에 관한 언급이나 명령을 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도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풀었던 사례나 그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유아뱁티즘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human invention)이며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리이자 관습이자 전통이다. 침례교회에서는 뱁티즘은 오직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들에게만(believers only)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 Credo-baptism)이라고 부른다.

유아뱁티즘을 행하는 교회들에서는 구약의 할례가 신약성경에 와서는 유아뱁티즘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에서는 뱁티즘 자체에 죄를 사하고 구원을 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루터교회에서도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John H. Armstrong, ed., Understanding Four Views on Baptism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7], 91-109). 개혁교회에서는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근거하여 유아뱁티즘의 정당성을 설명한다(Ibid., 59-72). 유아뱁티즘 자체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고는 주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의 "인침"(sealing)이 그리스도인 부모의 자녀들이 받는 유아뱁티즘에 있다고 본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와 그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다(창 17: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서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그래서 신약에서는 유아뱁티즘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간의 새로운 언약의 증표(sign)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갓난아기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유아뱁티즘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Ibid., 64-8). 할례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이었다면, 유아뱁티즘은 신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아뱁티즘이 신약에서 구약의 할례를 대체하게(replace) 되었다고 주장한다(Ibid., 70-2).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다. 할례는 유대인 부모에게서 "육체적인 출생"(physical birth)을 한 아들(son)에게만 태어난 지 8일만에 행해진 의식이었고, 이방인인 성인남자(Gentile adult man)가 육체적인 유대민족의 일원이 되고자 할 때 할례를 행하였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육체적인 이스라엘(Physical Israel)로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Spiritual Israel)이다. 영적인 이스라엘, 즉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영적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뱁티즘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을 경험한 신자가 교회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의식이다. 만약 할례가 신약에 와서 유아뱁티즘이 되었다고 한다면, 남자 갓난아기나 남자 아이에게만 유아뱁티즘을 베풀어야 할 것이고, 그것도 태어난 지 8일만에 베풀어야 할 것이다.

구약의 할례에 대칭이 되는 신약의 언약은 유아뱁티즘이 아니라, 영적인 할례, 즉 마음의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다. 영적인 할례는 죄인이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적인 믿음"(experiential faith), 다른 말로 하면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을 가리킨다. 신약에서는 유아뱁티즘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는다. 골로새서 2장 1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그(예수 그리스도-필자 주)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구약의 할례는 사람의 손으로 하는 할례인데, 신약의 할례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not with a circumcision done by the hands of men), 즉 "그리스도의 할례"(but with the circumcision done by Christ)다. 이것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마음의 상태, 즉 마음의 할례(circumcision in the heart)인데, 죄인의 회개와 믿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는 방법 이외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없다. "혈통"(of natural descent)으로도 안 되고, "육정"(of human decision)으로도 안 되고, "사람의 뜻"(of a husband will)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but born of God) 한다. 이를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unless he is born again)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거듭난다는 말은 두 번째로 나는 것이요 위로부터 나는 것이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을 가리킨다. 단순하게 말하면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인 것이다. 유아뱁티즘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음을 고백하는 신자의 뱁티즘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자녀됨의 언약이다. 불신자나 유아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마른 죄인(dry sinner)을 젖은 죄인(wet sinner)으로 만들 뿐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 유언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뱁티즘을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는 자들이 되게 하여-필자 주) "제자가 된 자들에게" 뱁티즘을 베풀라고 유언으로 명령하신 것이다. "제자가 된 자들의 갓난아기들이나 어린 자녀들에게" 뱁티즘을 베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설사 목사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그 자녀가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이다. 육체적 출생 그 자체가, 그리고 유아뱁티즘을 받았다고 해서, 비록 그 부모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뱁티즘을 받은 불신자들"(baptized unbelievers)이 적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그 분의 제자가 된 사람이 뱁티즘을 받아야 한다.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 때 뱁티즘을 받게 되었거나 확실한 신앙고백에 근거하지 않은 뱁티즘을 받았기 때문에, 뱁티즘은 받았으나 여전히 죄사함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인 것이다. 죄사함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아뱁티즘을 받지 않으셨다. 나이가 30살 정도 되셨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비로소 뱁티즘을 받으셨다. 사도 바울도 성인이 된 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났을 때 아나니아에게서 뱁티즘을 받았다(행9:1-19). 예수님으로부터 지상명령의 유언을 받았던 제자들의 의식 속에도 갓난아기들이나 어린 아이들에게 뱁티즘을 베푼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 어디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아뱁티즘을 베풀었다는 말이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집안 식구들이 뱁티즘을 받았다는 진술이 몇 군데 등장하기 때문에(가문뱁티즘, Household Baptism, 행2:38-39, 16:15, 30-34, 18:8; 고전1:14), 유아뱁티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안 식구들 가운데에는 유아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진술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복음을 들었거나 성령을 받았거나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 뱁티즘을 받았다는 것을 곧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간수의 온 가족들이 뱁티즘을 받았는데, 그들 모두는 주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을 "믿었고," 그래서 "크게 기뻐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뱁티즘을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31-34).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고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19:14)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수하셨다"(마19:15)는 말씀과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막10:16)는 말씀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에게 뱁티즘을 베푸셨다"는 말씀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안수나 축복보다 더 절차가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더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 뱁티즘인데,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뱁티즘을 베푸셨다면 왜 그 사실이 네 복음서들 가운데 한 곳에서라도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결국 예수님께서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뱁티즘을 베푸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는 뱁티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된 신자들에게만 베푸는 것이지,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푼다는 것은 애당초 생각조차 없으셨던 것이다.

사실 성경에는 "유아뱁티즘"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아니 성경에는 유아뱁티즘 행습 자체가 없었다. 그것은 2-3세기경 교부들 중 일부가 만들어낸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다.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에 어떤 이들은 당시 유아들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유아들이 죽었을 때 그 영혼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풀어서 원죄를 사함받는 것으로 하자는 "뱁티즘중생설"(baptismal regeneration)을 주장하는 교부들이 생겨났고, 또한 성례 자체에 죄사함과 구원을 주는 신비스러운 능력이 있다고 믿는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었고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학과 교리의 산물이었다.

주후 150년경의 작자 미상의 문헌인 "디다케"(Didache, "열두 사도들의 교훈집" The Teachings of the Twelve Apostles)라는 글이 있는데, 뱁티즘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담겨 있다:

이렇게 뱁티즘을 주어라. 흐르는 물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뱁티즘을 주노라"라는 말을 먼저 하라. 그러나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에서 주되, 찬물에서 줄 수 없으면 더운 물을 사용하여라. 그러나 만일 이러한 물도 없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머리에 세 번 부으라. 뱁티즘을 주기 전에 뱁티즘을 주는 자와 받는 자들은 금식을 해야 한다. 뱁티즘을 받는 자들에게 하루 혹은 이틀 동안 금식할 것을 주문해야 한다. (Henry Bettenson, ed. The Early Christian Father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50)

이 문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흐르는 물에서"(in running water) 뱁티즘을 베풀라는 것은 침수례(immersion)에 의한 뱁티즘이 정상적인 초대교회적인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더운 물을 사용하든지"(use warm water), "머리에 물을 세 번 부으라"(pour water on the head thrice)는 표현에서 "예외적으로" 약례(略禮)가 행해질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다케"는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 글에 근거하여 약례의 방식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디다케" 문헌에서는 유아뱁티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뱁티즘 받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 "뱁티즘을 받는 자들에게 하루 혹은 이틀 동안 금식할 것을 주문해야 한다"(you must order the baptized to fast for a day or two)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유아뱁티즘이 2세기 중반까지는 아직 상례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금식을 하라고 권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침례의 중요성』(Your Baptism Is Important)이라는 책에서 앤더슨(Stanley E. Anderson) 박사는 유아뱁티즘은 율법과 복음을 뒤섞는 것이며 유대교와 기독교를 혼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뱁티즘과 할례의 두 의식은 전혀 그 뜻이 다르며, 이 둘을 서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장사지낸바 되고 부활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상징하는 뱁티즘을 없애고자 하는 절망적 기도에 불과하다. 그것은 한 조각의 새 천을 헌 옷에 갖다 붙이는 것과 같으며, 그 결과는 떨어진 옷을 깁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다(마 9:16).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신자라면, 아무도 유대교를 기독교와 혼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Stanley E. Anderson, 『침례의 중요성』[Your Baptism Is Important], 이요한 역 [서울: 침례회출판사, 1975], 154)

저명한 침례교 조직신학자 스트롱(A. H. Strong) 박사는 할례와 뱁티즘을 결부시키는 것은 복음의 진의를 오해한 데서 연유한 것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할례의 위치를 대신하는 것은 뱁티즘이 아니라 중생이다(What takes the place of circumcision is not baptism, but regeneration). 바울은 그 의식(할례-필자 주)을 디도에게 베풀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할례를 교회에 매어두려는 의도를 봉쇄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유대주의자들은 유아뱁티즘의 형식으로 할례를 계속시켰으며, 그 후에는 유아뱁티즘의 형식으로 할례를 존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Valley Forge, PA: Judson Press, 1979], 955)

"오직 믿음!"(sola fide!)을 외쳤던 루터와 깔뱅이 약 1,0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로마가톨릭교회의 유아뱁티즘 전통을 끊어내지 못하고 답습한 것은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성례(주의 만찬)를 단지 상징으로 보았던 쯔빙글리마저도 취리히 시청에서 열린 제3차 공개토론회(1525년 1월 17일)에서 취리히 시의회의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교일치의 중세적 전통이었던 유아뱁티즘을 버리지 못하였다(William R. Estep, The Anabaptist Story: An Introduction to Sixteenth-century Anabaptism [Grand Rapids: Willia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6], 19-21). 도리어 신자의 뱁티즘을 주장하는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소나기 같은 비난을 퍼부으며 "비더토이퍼"(Wiedertaeufer, Rebaptizer, Anabaptist)라고 경멸적인 언사를 사용하며 조롱하고 정죄하였다(김승진, 76).

루터, 깔뱅, 쯔빙글리를 비롯한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은 중세 1,000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온 로마가톨릭적인 유아뱁티즘의 관습을 타파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충분히 신약성서적인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restitute, restore)해내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었다(김승진,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 [서울: 나침반출판사, 2015], 319-34). 엄격히 말하면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와 유아뱁티즘을 행하는 것은 상호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는 믿음(구원하는 믿음, saving faith)을 가질 수도 없고 신앙고백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손자·손녀"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아들·딸)가 되는 것이지 유아뱁티즘을 받음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이시지 "할아버지 하나님"(God the Grandfather)이 아니시다. 16세기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Biblical Anabaptists)처럼 침례교인들은 뱁티즘이 오직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 분을 향한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에게만 베풀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신자의 뱁티즘"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서적인 뱁티즘(Biblical Baptism)이라고 믿는다.

(2) 침수례에 의한 뱁티즘

또한 오늘날 침례교인들은 특별한 예외적인 상황(임종을 앞둔 환자,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중환자, 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진 자 등)이 아닌 한, 전신을 물속에 잠그는 "침수례에 의한 뱁티즘"(Baptism by Immersion)을 행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3-4절과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언급했던 대로, "죽음"(death)과 "장사"(burial)와 "부활"(resurrection)의 행동언어를 가장 잘 상징해 주는 뱁티즘의 방식은 침수례다. 상징을 약례화(略禮化)해 버리면 상징하고자 하는 원뜻이 파괴되거나 왜곡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星條旗, The Stars and the Stripes)에는 파란 바탕에 흰 별 50개가 그려져 있고 빨간 줄과 하얀 줄 13개가 가로로 그려져 있다. 잘 알고 있다시피 별 50개는 현재 미국의 50개 주를 상징하고 있고 줄 13개는 미국이 건국될 당시에 존재했던 13개 주를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작과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약식화하여 별을 25개만, 줄을 6개만 그린다면 이것들은 무엇을 상징해줄 수 있는가? 상징을 약식화하면 상징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가 왜곡되어 버리는 것이다.

뱁티즘(침례)은 복음의 양대 기둥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crucifixion)과 부활하심(resurrection) 그리고 예수를 믿은 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음(identification)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뱁티즘(세례)은 죄를 씻는 것도 아니고 죄씻음을 상징해주는 의식도 아니다. 기독교는 죽고 사는(die and live) 종교이지 씻어주고 말려주는(wet and dry) 종교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침례받는 자가 행하는 제자도(discipleship)의 고백이기도 하다. 새 생명을 얻게 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Savior)로뿐 아니라 주님(Lord)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헌신의 고백이요 표현인 것이다. 뱁티즘의 의미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마 28:19-20)에 대한 "순종"(Gehorsam, Obedience)인데, 그분을 진심으로 믿은 자가 맨 먼저 순종해야 하는 것이 뱁티즘을 받는 것이다. 침례교회에서는 내용에 있어서도 순종하고("신자의 뱁티즘"), 형식에 있어서도 순종하는("침수례")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여 따르지 않는 것은 유언하신 분에 대한 불충(不忠)이다.

그래서 침수례에 의한 신자의 뱁티즘을 받는 것은 교회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교회회원(church member)이 되는 전제조건이다. 뱁티즘(침례)을 받는 자는 교회의 회중 앞에서 "저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의 옛 습관과 옛 삶을 장사지내고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의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도 여러분의 신앙공동체에 일원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뱁티즘은 그 본질에 있어서 (구원을 뿌려주는) 성직자의 의식이라기보다는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뱁티즘 받는 자의 의식이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는 "뱁티즘"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뱁티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신자를 물속으로 침수시키는 것(immersion of a believer in water)이다. 그것은 순종의 행위인데,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지낸바 되시고 부활하신 구주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고 옛 삶을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 즉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symbolizing)이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종국적으로 부활할 것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증언하는 것(testimony)이다. 교회의식으로서 침례는 교회회원이 되는 권리와 주의 만찬에의 참예를 위한 전제조건이다(prerequisite to the privileges of church membership and to the Lord's Supper)." (Blount and Wooddell, ed., 213-4)

(계속)


3. 중생한 자들로 교회회원을 삼는 교회


침례
(Photo : ⓒ Pixabay.com)
▲예수의 침례

침례교회에서는 교회를 우주적 교회와 지역교회로 설명한다.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예수를 믿은 모든 신자들을 의미하고, "지역교회"(Local Church, 개교회)란 일정한 시대와 지역에서 의도적으로 모인 예수 믿은 신자들의 지역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양자 모두 예수 믿어 거듭난 신자들이다. 지역교회는 교회 앞에서 침례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을 회원으로 삼고 있다. 침례교인들은 "신자의 침례에 의한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 by Believer's Immersion Baptism)가 신약성서가 말하는 교회라고 믿고 있다.

깔뱅과 개혁교회는 교회를 "비가시적인 교회"(Invisible Church)와 "가시적인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하는데, 그 기본개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God's Elect)이다. 그런데 누가 "택함받은 자들"(The Elected)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택하심"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을 뿐, 인간은 누가 택함받은 자인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침례교회에서는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나는 택함받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교회를 "택함받은 자들"(Those who are elected)로 정의하는 개혁교회에서는 "택함받을 자들"(Those who are to be elected)까지도 교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필자는 <한국크리스천신문> 제114호(2015. 10. 29.)에서 어느 깔뱅주의자 논설위원장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Q&A 란에서 어떤 성도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교회에 가는데, 교회란 무엇인가요?" 논설위원장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의 근본적인 의미는 '창세 전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이예요.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로서 선택받은 모든 자들을 가리켜요. 즉, 이미 구원받은 자들, 현재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 앞으로 믿게 될 자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지요...."

"앞으로 믿게 될 자들"이나 "장차 택함받을 자들"은 아직 예수 믿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이요 죄인들이요 그래서 전도대상자들이다. 교회를 "택함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정의하면 교회의 개념이 모호해져 버리고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자들까지도 교회에 포함시키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불신자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신약성서적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교회"(ecclesia, church)를 언급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여기서 "이 반석 위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거의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자신을 향한 베드로의 신앙과 그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시겠다고 공언하신 것이다.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신앙고백에 근거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의도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침례교회는 "중생한 자들로 교회회원을 삼는 교회"(Regenerate Church Membership)이다. 중생한 자, 즉 거듭난 자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신자이고, 그가 교회 앞에서 침례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후 교회회원이 된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는 "지역교회"의 개념을 선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성서적 교회는 침례받은 신자들의 자치적이고 지역적인 회중이다"("A New Testament church of the Lord Jesus Christ is an autonomous local congregation of baptized believers," Blount and Wooddell, ed., 212).


4.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 그리고 협동

침례교회에서는 지역교회는 독립성(independence)과 자치권(autonomy)을 가진다고 믿는다. 각 지역교회는 상호 독립적이다. 동시에 각 지역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자치적으로 운영된다. 19세 이상의 침례받은 교회회원들로 구성되는 사무처리회(Business Meeting, 사무총회)가 지역교회의 최고의사 결정기관이다. 지역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스스로"(autos) "규범"(nomos)이 된다. 각 지역교회는 "스스로 통치하는 유기체"(a self-governing organ)이다(김승진, 『영·미·한 침례교회사』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16], 70).

사실 신약성서시대에는 오늘날의 지방회, 노회, 총회, 연회 등과 같은 연합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1세기 당시에 지상에는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에베소교회 등과 같은 지역교회들(local churches)만 존재하였다. 교회역사가 진행되면서 지역교회들 간의 교제와 상호협력 그리고 치리를 위해서 지역교회들을 묶어주는 연합회가 생긴 것이다. 신약성서적인 교회를 이상으로 하는 침례교회에서는 지역교회 밖에 있는 영향력 있는 개인이나 단체(지방회, 노회, 총회, 연회 등)가 지역교회의 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하거나 통치할 수 없다고 믿는다. 지방회나 총회는 지역교회를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이지 지역교회 위에 군림하는 상위기관이 아니다. 지방회나 총회에 참석하는 대의원은 지역교회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남침례교에서는 대의원을 "심부름꾼, 사신, 소식전달자"을 의미하는 "메신저"(messenger)라고 부르고 있다. 비록 지방회나 총회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다고 하더라도 참석자가 개인자격으로 참석하여 표결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결정이 지역교회를 당연히 구속(拘束)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 결정을 수용할지의 여부는 최종적으로 지역교회의 사무처리회가 결정하는 것이다.

침례교인들은 지역교회의 정치와 행정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민주적 회중주의"(Christ-centered Democratic Congregationalism)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만의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전체 교회회원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안들을 다수결 투표(majority voting)에 의해 결정하고 운영해야 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신본"(神本), 즉 하나님의 뜻을 어떤 방법으로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교황이나 감독이나 당회회원들이 기도하며 찾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19세 이상의 침례받은 교회회원들 전체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 "신본"으로 여기는 것이 침례교회의 "지역교회자치주의"(autonomy of the local church)요 민주적 회중주의(democratic congregationalism)이다.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2000)는 제6조항 "교회"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각 회중은 그리스도의 주님되심(Lordship) 아래에서 민주적인 과정들을 통해서 운영한다. 그러한 회중에서 교회회원 각자는 주님 되신 그리스도께 의무를 다하며 책임을 진다(responsible and accountable)"(Blount and Wooddell, ed., 212).

동시에 침례교인들은 "협동하는 사람들"(People of Cooperation)이다(김승진, 『영·미·한 침례교회사』, 71). 침례교인들은 지역교회 하나의 능력이나 자원으로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적인 사역(교회개척, 해외선교, 신학교육, 구제활동 등)을 위해서 지방회나 총회를 통한 협동사역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침례교인들은 지역교회의 "독립"(independence) 및 "자치"(autonomy)와 지방회나 총회를 통한 지역교회들의 "협동"(cooperation)은 상호 배치된다고 보지 않는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 제14항목에서 "협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상황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큰 목적을 위하여 최선의 안전한 협동을 이루어 내기 위하여 지방회들과 총회들을 조직한다. 그러한 기관들은 조직들 상호 간에 혹은 지역교회들 위에 군림하는 권위를 갖지 않는다(Such organizations have no authority over one another or over the churches). 그것들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 교인들의 에너지들을 이끌어 내고 연합시키고 지도할 목적으로 구성된 자발적이고 보조적인 기관들이다. 신약성서적 교회들의 회원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선교적, 교육적, 구호적 사역들을 추진하기 위해 서로 협동해야 한다(Members of New Testament churches should cooperate with one another in carrying forward the missionary, educational, and benevolent ministries for the extension of Christ's Kingdom)...." (Blount and Wooddell, ed., 222)

5. 종교문제에 있어서의 영혼의 유능성

침례교인들은 죄사함 받고 거듭나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절대적으로 공짜인 선물인데, 그 선물은 인간이 의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선물이다"(Salvation is an absolutely free gift from God, but which is to be wilfully received by man)라고 믿는다(김승진,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 165). 선물은 주어졌지만 받는 자가 감사하며 손을 내밀어 받지 않고서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침례교인들은 최소한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 "판단할 수 있는 능력," "결단할 수 있는 능력," 그래서 "복음 앞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 affirmatively or negatively before the Gospel)이 있다고 본다. 이를 침례교에서는 "종교문제에 있어서의 영혼의 유능성"(Competency of the Soul in Religion)이라고 말한다(김승진, 『영·미·한 침례교회사』, 68).

"하나님 아래에서 종교문제에 관한 한 인간영혼이 유능성을 가진다는 교리"야말로 침례교인들에게 가장 특징적인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이 교리는 모든 침례교 신앙의 특징들을 떠받치는 기초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 아래에서의 유능성"(competence under God)이지 "인간의 자기충족성(human self-sufficiency)이라는 의미에서의 유능성"이 아니다(McBeth, "제3장 하나님은 영혼의 유능성과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의 원리를 주셨다," Charles W. Deweese, 『21세기 속의 1세기 신앙』, 김승진 역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7], 110). 필자의 스승이었던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원의 레온 맥베스 박사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짤막한 복음성가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의 가사가 이러한 침례교신앙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영어가사를 보면 그 뜻이 더욱 선명해진다: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x 3), No turning back (x 2)."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have decided, 결심, 결단)했다는 고백인 것이다(Ibid., 107).

비록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여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면 마음문을 여는 결단,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으로 영접할 수 있는 결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 will)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이 없다면 전도는 왜 하는가? 전도대상자로 하여금 결신(decision)을 하도록 하는 것이 전도 아닌가? 회개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회개하는 것이고,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믿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라고 외쳤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명령하였고 약속하였다. 극단적인 깔뱅주의자들(Hyper-calvinists)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total depravity of man)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동시에 "믿을 능력도 없다"고 주장하는데(Fisher Humphreys, The Way We Were [Macon, GA: Smyth & Helwys Publishing, Inc., 2002], 70), 인간이 믿을 수 있으니까 침례 요한과 사도 바울이 "믿으라"고 명령했던 것이 아닌가? 죄인 각자의 개인적인 결단에 의한 회개와 믿음, 신자의 침례에 의한 신자들의 교회,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 그리스도 중심적인 민주적 회중주의, 지방회와 총회 사역에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동 등이 "영혼의 유능성"을 믿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도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인해 죄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 자유의지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다. 그 분은 창조의 지고한 사역으로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태초에 인간은 무죄하였고 창조주로부터 선택의 자유(freedom of choice)를 부여받았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범했고 죄가 인류에게 들어오게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이 사람은 그분과의 거룩한 교제로 인도될 수 있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인간성의 신성함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민족의 각 사람은 완전한 존엄(full dignity)을 소유하고 있고 존경과 크리스천 사랑(respect and Christian love)을 받을 가치가 있다." (Blount and Wooddell, ed., 205-6)

6. 교회의 두 의식에 대한 성례전주의적인 해석의 배격

침례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주의 만찬"(Lord's Supper)과 "침례"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거나"(symbolize) "기념하는"(memorialize) 의식이라고 믿는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 Theory)을 제4차 라테란공의회(1215) 결정 이후 미사의 핵심교리로 삼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이러한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 교리를 비판하였지만 두 예전을 이해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그 개혁이 미진하였다. 루터와 깔뱅의 경우 뱁티즘에서 "유아세례" 전통을 견지하였으며 초대교회의 침수례 방식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주의 만찬"에 있어서도 루터는 공재설을, 깔뱅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공재설"(Consubstantiation Theory)이란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really) 그리고 육체적으로(physically) 임재한다는 주장이었다.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 Theory)은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spiritually) 임재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나 성령은 인격체이신데, 무생물이자 비인격체인 떡과 포도주에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임재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무생물이자 비인격체인 떡과 포도주에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임재하여 거룩하게 되고 그것들이 영적인 양식이 된다고 믿는 것은, 화체설이 그러하듯 일종의 신앙적인 미신이다.

성령께서는 떡과 포도주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은 신자들에게 임하셔서(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순간부터 이미 임해 계신다), 그 떡과 그 포도주를 나를 위해 십자가상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살과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간주"(regard)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만찬에 참예하면서 2,000년 전에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공재설이나 영적 임재설은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전이된다는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례는 형식일 뿐이고 상징일 뿐이고 기념일 뿐이라는 "성례형식주의"(sacramentarianism)에 입각한 해석이 신약성서적인 것이고 그것이 진정 영적인(spiritual) 것이다. 침례교회에서는 성례전주의를 배격하고 성례형식주의를 따르고 있다. 떡과 포도주 앞에서 성직자가 기도하거나 축사한다고 해서 떡과 포도주 그 자체가 거룩하게 되는가? 한국교회에서는 거룩할 '성'(聖) 자를 붙여서 성만찬(聖晩餐)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성만찬에 해당하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주의 만찬"(고전 11:20), "주의 잔"과 "주의 식탁"(고전 10:21), "주의 떡이나 잔"(고전 11:27), "주의 몸과 피"(고전 11:27)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주님이 차리시고 주님이 베푸시는 식사이고 주님이 주인이신 저녁식사라는 의미이다. "주의 만찬"(Lord's Supper)이 성경적인 용어다. 성만찬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에서도 침례와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상징하고"(symbolize)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기독교적인 뱁티즘-필자 주)은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지낸바 되시고 부활하신 구주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상징하는 순종의 행위(an act of obedience symbolizing the believer's faith in a crucified, buried, and risen Savior)이다.... 교회의 의식으로서 그것은 교회회원됨의 권리와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전제조건이다.

주의 만찬은 순종의 상징적인 행위(a symbolic act of obedience)인데, 이 의식을 통하여 교회회원들은 떡과 포도나무의 열매를 받아먹음으로써 구속주의 죽음을 기념하고(memorialize) 그분의 재림을 고대한다(anticipate)." (Ibid., 213-4)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