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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의 시집에서 - 눈물이라는 뼈

유정 김용호 2022. 12. 23. 15:25

중국 옛이야기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 일 밤을 지새우며 기다린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이렇게 짧고 깊은 이야기.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사랑의 단상>>에서 '기다림'에 관해 말하는 대목 끝마다 적어 두었는데, 그저 그러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 가장 약한 유리로 지은 집과 같아서 잘못 들어갔다가는 깨뜨리고 나오게 되니까. 

                       *

  먼저 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시간이다. 절망의 대가 에밀 시오랑은 이렇게 말한다. "동물이나 식물의 단계를 겨우 벗어난 사람들이 인간이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조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인간만 제외하고 무엇이든 좋다고 생각한다."(<<절망의 끝에서>>,   강, 1997. p. 102). 대체로 인간이라는 것에 전햐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23세의 청년은 이렇게 덧붙인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매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 될 것이다." 

 

          

눈물이라는 뼈        /김소연

 

 

암늑대가 숲속에서 바람을 간호하는 밤이었대. 바람은 상처가 아물자, 숲을 떠나 마을로 내려갔대. 암늑대가 텅 빈 두 손을 호호 불며, 우듬지에 앉은 지빠귀를 올려다보는 밤이었대. 섭생을 위해서 살생을 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늑대 이야기에, 한 아이는 밑줄을 긋고 있었대. 바람은 그 지붕 위를 저벅저벅 밟고 다녔대. 암늑대는 노란 지빠귀를 올려다보고, 노란 지빠귀는 늑대를 내려다보았대. 둘은 눈을 떼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대. 그래서 겨울밤은 감옥이 되기 시작한 거래.

 

바람은 이불처럼 마을을 덮었다가, 이내 사납게 지붕들을 부수며 뛰어다녔대. 한 아이가 등불을 끄고 누울 때 두 손을 가슴에 얹는 것은, 이 겨울밤에 닥친 이야기의 죄값에 대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래. 안다는 것에 대해 가슴이 미리 떨리기 때문이래. 세상이 잠이 들자, 암늑대는 나무둥치를 갉았대. 발톱을 힘껏 세워 갉아댔대. 지빠귀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대. 그 부리로 더 이상 먹지도 않았대. 앙상한 나뭇가지만을 쪼아대고 있었대. 바람은 온 마을을 한 바퀴 휘감고는, 장전을 끝낸 총구처럼 날렵하게 북상 중이었대. 바람은 그럴 때 아이들의 악몽을 빼앗아 달아난대. 악몽이 빠져나간 아이들의 이마는 허름해지고, 지빠귀가 쪼아댔거나 먹어댔거나 노래했거나, 암늑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대.

 

바람을 간호하던 암늑대의 긴 혓바닥이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질 때, 비로소 아이는 늑대의 섭생을 이해하는 한 그루 어른이 되는 거래. 그때 바람은 떠났던 숲으로 돌아가지 못해 더 큰 목소리로 운대. 눈물이 사라진 어른들을 믿을 자신이 없어, 아이도 모로 누워 남몰래 운대. 밤새 흘러내린 눈물로 마당이 파이기 시작하면, 바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돌부리들이 죽순처럼 쑥쑥 마당을 뚫고 올라온대. 누군가는 그 돌을 주워 피리를 불고 누군가는 그 돌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대. 늑대가 섭생을 위해 밤새도록 무엇을 원했는지는,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 , 알 수가 있대.

 

섭생을 위해서 살생을 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늑대 이야기에, 한 아이는 밑줄을 긋고 있었대. 이 부분에서 존재의 비극 떄문에 눈물을 훔쳐야만 할 때, 아이는 비로소 "비로소 아이는 늑대의 섭생을 이해하는 한 그루 어른이 되는 거래."가 된다. 

 

 

(신해철 님의 평론중에서) 

 

2022.  12. 25. Merry X-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