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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시·수필

내게 다가오는 작은 변화에 감사하면서

by 유정 김용호 2011. 8. 4.

 


  내게 다가오는 작은 변화에 감사하면서


5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내 몸마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먼저 노안현상이 그것이다. 약병에 붙어있는 설명서의 작은 글씨를 잘 읽을 수 없다. 돋보기를 들이대고 보아야 한다. 연전에 선배 지점장실에 놓여있던 큼지막한 돋보기를 보고는 참 저 선배 나이가 제법 든 게로구나 하면서 좋게 보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던 내가 사무실에 돋보기를 항상 곁에 두고 있다.  아니, 이제는 아예 돋보기 안경 두 개를 장만해서 집에도 두고, 사무실에도 두고 산다. 집에 있는 돋보기 안경은 아내가 성경 볼 때 더러 애용하는 모양이다. 

나는 살이 찐 편이 아니라서 뱃살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제법 뱃살이 나와서 은근히 걱정이다. 옆구리 군살이 보기에 약간 좋지 않을 정도로 퍼져가는 모양새다. 상의를 벗을 때마다 일부러 가슴을 들어올려서 양허리가 들어가게 만들어보곤 한다. 맨날 아침 운동을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겨우겨우 시간을 내서 인근 야산을 오른다. 아침에 운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50대 후반, 60대가 전부다. 몸이 안 좋아지니 관심이 많아지는 세대인 거다.  아침운동때 빼놓지 않고 하는 운동이 푸샵이다. 낮은 의자에 양손을 뻗치고서 겨우 22개를 한다. 물론 허리를 날씬하게 유지하려는 목적에서다.

무릎도 가끔씩 시큰거리기 시작했디. 마음 먹고 등산을 할 요량이면 반드시 무릎 보호대를 챙긴다. 경사가 급한 산은 저절로 꺼려지고, 특히 급한 내리막길은 피하게 된다. 또 젊어서 등산 가면 맨 먼저 오르길 좋아하고 어지간히 높은 산도 곧장 치고 오르던 것이, 지금은 주말 농장 갈 때 초입의 작은 경사면 오솔길을 오르면서도 아이구 숨차네 하면서 올라간다. 아내도 매번 같은 소리다. 물론 금새 오르막길에 익숙해지면서도 말이다.

이래저래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느끼는 세대가 되었다.

어디 이전에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왔던 내가 아닌가!


음식을 먹을 때도 신경쓰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쇠고기는 내 돈 주고도 사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고 돼지고기는 누가 사주면 먹고 오리고기는 내 돈 내고도 사먹으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오리고기엔 불포화 지방산이 있어 기름이 체내에서 엉기지 않는다고 한다. 쇠고기는 약 41℃에서 녹는다고 하니 왠간한 소화기능이나 채왜배출이 안되면 몸에 좋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몸의 온도가 36.5℃이므로 왜 쇠고기 기름이 좋지 않는 것인지 설명이 된다.

또한 맛도 괜찮고 가격이 싼 편인 오리고기 주물럭이나 오리탕이 내게 인기가 있는 건 당연하다.

이보다 더 즐기는 것은 생선찜이다. 해풍에 적당히 꾸들꾸들하게 말린 것이면 회로 쳐서 먹는 것 보다 훨씬 맛이 좋다. 아마 육류 생선류를 다 합쳐서 제일 맛있는 요리는 꾸들하게 말린 바다생선찜일 것이다.

처가집인 거제도에 가면 으례 먹게 되는 톳나물, 1년 이상 숙성된 멸치 젖국에 버무려서 내어주는 장모님의 톳나물 무침은 그 맛이 일품이다. 흰 쌀밥과 톳나물 무침으로 밥 한 그릇을 비운다.

해안지역에서 봄에는 도다리쑥국이라지만, 도다리 싱싱한 놈과 함께 미역을 넣고 멸치젖국으로 끓여낸 도다리미억국은 정말 시원하고 맛있다. 국 한 그릇으로 공기밥 한 그릇을 비우기에 넉넉하다.

산골에서 자란 나지만 해물류에 입맛이 배어 있는 건 사람이 태초에 바다에서부터 나온 동물인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제주도 해안지역의 장수마을 할머니들 이야기를 TV로 보면서 역시 해물이 몸에 좋겠다는 생각에 믿음이 더 간다.

 

나이가 들고 객지생활을 하면서 변하는 것이 있다.

꽃과 식물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위에 너무 흔하게 있는 것인데도 이름은 커녕 아예 관심 밖에 있던 것들이 무척 살갑고 정겹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팝나무를 알기 시작한 것은 3년전 5월의 진주 강변에서다. 가로수에 하얗게 눈꽃 송이송이 마냥 달린 것이 너무나 탐스러워서 신록의 잎새 위에 소복히 내린 함박눈에 비유할 만 하였다. 옛날 배고픈 시절의 우리 선조들은 꽃 모양이 마치 잇밥(쌀밥) 같다고 해서 이팝나무라고 이름하였다지만, 역시 눈꽃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적당해 보인다. 작년에 처음으로 대전 유성에서 해마다 5월 눈꽃축제가 열리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대전에 산 것이 25년이 되었는데도! 덩달아 심어놓은 부여의 가로수도, 목동 우리 아파트의 가로수도 이팝나무였던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서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아내에게 한마디 한다.

“야! 저 꽃 한 번 봐라, 너무 하얗지 안 그래?”

아내는 별로 흥미도 없는 듯 건성으로 들어 넘긴다. 나만 여성화되는 에스트로겐이 분비되기 시작하는 건가? 아니, 지금 이 순간에는 이상구 박사가 말하는 엔도르핀이 솟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와 비슷한 조팝나무는 좁쌀을 튀겨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설유화. 설유화(雪柳花)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마치 눈이 내린 버들가지 같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으로 여겨진다.


때아닌 늦은 봄

마당 끝에서 동구밖까지

잔가지 줄줄이

하얀 눈꽃 소담스럽더니


눈꽃 하얗게 묻힌 빗자루로

동구밖 손님 맞이 청소하다가 

훌훌 털어

눈꽃가루 바닥에 가득하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나

꽃자국조차 잊은 연두잎 잔가지 

훠이 훠이

간간이 스치는 바람속에 흔들리고

눈꽃가루는 망각의 바닥에 누워

녹지 않고 마르고 있다 


늦은 봄을 빛내던 눈꽃의 눈부심은

내년 이맘때를 기약하는 또 하나의 그리움이다  

                                - 설유화를 생각하며(자작시 2011.7.29.)

 

설유화는 마치 싸리나무처럼 잔잔한 것이 그 옛날 내 고향집 삽작(싸리문앞)에도 지천으로 널렸던 나무였다. 인제는 그 흔적도 없이 시멘트벽에 철대문이 달린 고향집이지만 여전히 설유화는 이곳 저곳에서 많이도 피어나서 나의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꽃집에서 안개꽃을 꽃다발 장식용으로 많이 쓰긴 하지만 조팝나무보다 못한 것 같다. 하긴 조팝나무는 꽃이 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온통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흠이기는 하다.

꽃 이야기 둘만 더 하자.

능소화 이야기다. 양반집에서나 볼 수 있던 양반꽃, 장원급제한 사람의 화관에 꽂았다고 해서 어사화라고도 불리는 데 중국에서 전래되었단다. 마산에서  처음으로 6월이면 이웃집 담장 너머로 화려한 자태를 보여는 황금빛 꽃이 눈에 환하게 들어왔다. 알고보니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와 살던 집 담장에도 이 꽃이 화려하게 피고 있던 것이 아닌가! 인제는 이곳 저곳 가정집마다 많이 심겨져 있고, 거제도 처갓집에 다녀오면서 보니 국도변에도 널린 게 능소화였다. 꽃이 너무도 예뻐서 구해 보려고 애를 쓰다가 겨우 몇 뿌리 구해서 장동 주말농장 밭가에 세군데 심어 놓았다. 얼마 되지 않아 넝쿨이 신나게 뻗으면 아아치 모양으로 대를 세워 줄 생각이다.

망초꽃은 그저 외래종 잡초인 망초로만 수년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름도 잊어 먹었다가 다시 알아내곤 했던 한갓 풀에 불과했었다. 시골길을 드라이브하면서 빈 들판이나 길가에 가지런히 피어있는 하얀 꽃들이 너무도 소담스런 아름다움이었는데, 알고 보니 망초꽃이었다. 묵정밭이나 버려진 들길 가장자리, 개울가 둔치 어디든지 지천으로 깔린 망초꽃은 단연코 6월의 들판을 빛내는 아름다움이다.   


나이가 들어 서글퍼지는 신체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를 맞춰가고 세월의 준엄함에 순응해 가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더욱 건강의 소중함도 깨닫게 되고 한편 비교적 건강한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그렇게 화를 잘 내던 성격도 많이 변했다. 아내의 잔소리 쯤은 이제 우습게 받아 넘긴다. 심할 땐 자장가로도 여길 수 있다.

젊어서부터 자애하며 좀 더 너그럽고 덕이 있는 내로 살아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느낌과 기쁨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도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다. 자연 속에는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많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소중함과 순수함을 드러내는 들꽃이나 꽃나무를 보노라면 깨끗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나 자신의 모습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말없는 꽃나무 앞에서 내 지식은 보잘 것 없고 나라는 존재의 부족함까지 깨닫게 된다. 애당초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자연에서 배우는 이런 기쁨을 왜 진작에 모르고 바쁘게 살아 왔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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