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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시·수필

브라운관 앞에서

by 유정 김용호 2014. 4. 4.

 

        브라운관 앞에서

 

                                             김 용 호

 

채널 1.

창밖에는

아직도 단풍이 여전한 늦은 가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한 십자가 목걸이가

가쁜 숨을 그만 내려놓기로 한다

벼 이삭처럼 고개를 숙인

여인의 긴 머리숱 끝자락에 이슬방울이 달린다

 

채널 2.

새 출발을 축하하는

서설이 눈부시던 저녁

아직은 낯선 외국어들이

꽃샘추위에 매화꽃 지듯

무너져 내렸다

열아홉이 아홉 번 자막을 메우는 동안

슬픈 숫자들이 눈동자를 채운다

 

채널 3.

‘쌀라말레쿰’

(당신에게 신의 평화가 있기를)

시나이반도 아래

어느 바닷가에서

역설을 모르는 버스가

불에 타서

온몸에 검댕을 뒤집어쓰고 서 있다

 

브라운관 밖으로 나온

의미들이 울기 시작한다

                                       - 201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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