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 앞에서
김 용 호
채널 1.
창밖에는
아직도 단풍이 여전한 늦은 가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한 십자가 목걸이가
가쁜 숨을 그만 내려놓기로 한다
벼 이삭처럼 고개를 숙인
여인의 긴 머리숱 끝자락에 이슬방울이 달린다
채널 2.
새 출발을 축하하는
서설이 눈부시던 저녁
아직은 낯선 외국어들이
꽃샘추위에 매화꽃 지듯
무너져 내렸다
열아홉이 아홉 번 자막을 메우는 동안
슬픈 숫자들이 눈동자를 채운다
채널 3.
‘쌀라말레쿰’
(당신에게 신의 평화가 있기를)
시나이반도 아래
어느 바닷가에서
역설을 모르는 버스가
불에 타서
온몸에 검댕을 뒤집어쓰고 서 있다
브라운관 밖으로 나온
의미들이 울기 시작한다
- 201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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