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 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탁본 / 이영광 -
평안하다는, 서신 받았습니다
평안했습니다
아침이 너무 오래 저 홀로 깊은
동구까지 느리게 걸어갔습니다
앞강은 겨울이 짙어 단식처럼 수척하고
가슴뼈를 단단히 여미고 있습니다
마르고 맑고 먼 빛들이 와서 한데
어룽거립니다
당신의 부재가 억새를 흔들고
당신의 부재가 억새를 일으켜 세우며
강심으로 세차게 미끄러져 갔습니다
이대로도 좋은데, 이대로도 좋은
나의 평안을
당신의 평안이 흔들어
한 겹 살얼음이 깔립니다
아득한 수면 위로
깨뜨릴 수 없는 금이 새로 납니다
물 밑으로 흘러왔다
물 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
흰 푸른 가슴 뼈에
탁본하듯
(26)-몸 생각/이영광-
다급하면 물에도 뛰어들고 불도 움켜쥐듯
도구가 부족하면 손이 나서고
두 손이 모자라면 입이 나선다
집다가 안 되면 잡고 잡다가도 안 되면
무는 것이다 더 나설 것이 없을 땐
몸이 몸소 나설 수밖에 없다
찻길에 뛰어든 아이에게 달려드는 어미의
혼비백산이나, 지금 눈앞에서 깔깔대며
모텔 문을 열고 나서는 저 아이들의
땀에 젖은 한두 시간 전처럼
시든 몸이나 젊은 몸이나 사랑할 때나
죽을 때나, 불에 덴 그 몸이 굼뜬 몸뚱이를 화들짝
밀치고 나오는 것이다 몸주(主)라고 해야 할
이 황망한 것은 평생 그칠 줄 몰라,
이 짐승을 배고 낳고
배고 낳고 하느라 지상엔
임산부 아닌 몸이 없고,
영혼의 실종사고가 그치질 않는 것이다
그렇게 몸은 얼어붙었다 풀렸다 하며,
여기가 바다인가 뭍인가 내내 헷갈리는
한겨울 황태 덕장의 명태처럼 말라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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