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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 시.수필 등

글쓰기에 관하여 4.

by 유정 김용호 2024. 11. 9.

 

안정효 책을 읽다가 글을 쓰게 된 사연

 

  안정효의 글을 읽다보면 다독다작 다상량이 생각난다. 많은 작가들은 '삼다(三多)'의 습관을 들이는 것, '다작(多作)', '다독(多讀)', '다상량(多想量)'을 꼽는다. 글을 많이 써 보고, 책을 많이 읽어 보고, 많이 생각하라는 뜻이다.

사강대 영문과를 다니면서, 신문기자를 하면서 그는 누구보다도 다독에 매달렸다. 40년이 흐르는 동안 남독(濫讀)의 시대를 거쳤다. 해설보다는 직접 읽은 작품을 스스로 판단하고 나 자신을 위한 가치를 찾아내고자 함이었다. 얻는 바가 많았다.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들이 깊고 격렬한 감동을, 무한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던가.(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가 서정적 대서사시였다면,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인간의 대지>에 가슴이 뛰었다 - 아내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며 조난당한 비행사가 안데스산맥을 내려오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 스타인백의 <울적한 겨울>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울적해지는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안데스 산맥을 걸어 내려온 비행사의 얘기를 내 손으로 써보고 싶었다. 나는 종교의 정체성 때문에 고뇌하는 스티븐 디달러스나 성장의 해탈을 이루어나가는 홀든 콜필드 같은 인물을 창조해 내고 싶었다. 어느날 나는 모아둔 돈을 들고 문방구에 가서 2백자 원고지 3백 장을 샀다. 그리고 장편소설 <신의 유형자(流刑者)>를 쓰기 시작했다. 무작정 글쓰기였다. 그동안 퇴적된 경험과 지식의 일종의 배설행위였다.

안정효는 대학시절에 영어 장편소설도 습작으로 일곱 권을 써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밤나무집 The chestnut house><은마는 오지 않는다 Silver Stallion>으로 1989년에서야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우애령 뗏목 위에서

 

  여성동아에 장편소설 <트루먼스버그로 가는 길>이 당선된 것은 48세였다. 얼마나 불행했길래 그 나이에 소설을 쓰게 되었냐고 축하들을 해왔다.

  나는 젊어서 한 번도 소설을 써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나이가 40대가 다 지나갈 무렵에 갑자기 글을 써 볼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학위논문을 쓰기 전 소설을 한번 꼭 써보고 나서 단념해야겠다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다. 한번 꼭 써보고 나서 단념해야겠다는 생각은 비정상적이다.

  막상 백지 앞에 서니 어떻게 구성을 할지, 초보 요리사 같았다. 사강 같은 천재는 소녀시절, 카페에 앉아서 <슬픔이여, 안녕>을 쓰고, 도스토예프스키나 발자크는 빚쟁이를 문 밖에 세워두고도 불후의 명작을 썼다던데, 이건 영 막막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소설창작반에 다니면서 소설을 구성하는 법을 배웠다. (요즘은 책을 사서 봐도 될 듯) 몇 달을 남의 습작을 비판하고 자기는 정작 한 줄도 못 썼다.

  습작을 쓴 후 소설반에서 총평. 처음부터 거창하게 운명이니, 인간애니 하지마라. 물론 살아남는 고전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 것들뿐이다.

아마도 미국생활, 간호병동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로서 생활.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임상실습시 행복보다는 점점 불행해지는 운명에 놓인 사람들과 일하면서 어둠 속에 잠겨있던 이들의 영혼이 점점 빛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때 스스로의 영혼을 자신의 힘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고통을 호소하던 이들의 이야기가 내 속에 쌓여서 이를 박으로 내보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비극적이고 어두웠던 조부모, 아버지 형제들 이야기도 영향을 끼쳤다. 육이오와 실향민들. 만주 목단강가에 살던 중 해방전 일본군에 끌려간 아버지는 전사통보, 나는 유복자가 되어 태어났다. 해방후 혼자 사리원으로 내려오려던 어머니는 잘못 보낸 전사편지 이후에 돌아온 아버지를 만난다. 다시 육이오와 삼팔선. 달밤에 마지막 관문인 임진강 뗏목 얻어타기.

오랜 세월동안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친지, 스쳐 지나가는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고통과 슬픔이 평안과 기쁨보다 더 많이 그 흔적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강한 힘으로 휘두르는가... 우리는 운명에 맞서 싸울 아무 힘도 지니지 못한 무력한 존재인가... 의문은 지금도 내 곁에 머무르고 있다. 아마 나는 그 의문에 대답해 보려고 절망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사랑과 삶의 의미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쓴 글이 책이 되어 사람들의 머리 맡에 놓여있을 생각을 하면

마음속에 등불이 켜진 듯한 따뜻한 느낌이 든다.

 

첫 장편소설 <트루먼스버그로 가는 길>의 서문의 한 구절이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글을 쓰게 된 것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을 준 일들 중 하나다.

2024. 10.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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